천의 애수가 담긴 선률을 저주로운 일본땅에서도 울렸다는 자부심으로 엷은 미소가 피여올랐다. 
  그날의 자족감은 먼 후날에도 백고산의 가슴속에 지울수 없는 추억으로 깊이 새겨졌다.
  그때부터 백고산은 망국노의 쓰라린 체험속에 인연이 맺어진 민요 《아리랑》을 여느 노래보다 사랑하게 되였고 일본땅의 조선동포들속에서 《아리랑》을 연주하며 그들과 함께 설음을 나누었다.
  조국땅 부산에서 청진으로, 남에서 북으로 전국각지를 방황하며 어린 동생과 함께 류랑연주를 다닐 때에도 그는 늘 《아리랑》곡을 켜군 하였다.
  천재적인 바이올린수의 거침없는 손놀림과 진솔한 울림으로 연주되는 《아리랑》의 구슬픈 선률은 나라잃은 백성의 설음과 원한의 감정을 파고들며 언제나 관객의 심금을 울리였다.
  1943년 길거리를 떠돌면서 구걸연주로 끼니를 이어가며 발길이 닿는대로 방랑연주생활을 하던 백고산은 어린 동생의 손목을 끌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할빈에 이르렀다.
  할빈에서 순회공연나날에 그는 어느 로씨야인 음악가부부(남편은 바이올린연주가로서 후날의 옴스크음악대학 학장, 안해는 피아노연주가)를 만나게 되였다. 
  백고산형제의 바이올린연주를 들어본 로씨야인 부부는 그들을 할빈에서 제일 큰 극장이였던 《모데른》극장에 소개하여 공연을 할수 있게 해주었고 안해는 피아노반주까지 도맡아해주었다. 
  1시간 20분간 진행된 나어린 바이올린형제연주가의 공연은 관람객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안겨주었다.
  오열을 터뜨리는 관객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영낙없이 조선동포들이였다.
  민족수난의 그 세월에도 뛰여난 재능을 익혀온 그들형제의 소행이 너무도 기특하여 얼싸안고 환성을 올리는 동포들속에는 람루한 차림의 나어린 그들에게 새옷을 지어 입히는 동포까지 있었다.
  이런 속에서 백고산의 마음속엔 기량을 보다 련마하여 바이올린으로 민족의 재능을 떨쳐보려는 강심이 더욱 굳어져갔다.
  그는 9살난 동생을 홀로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로씨야인 음악가에게 개별지도를 받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육친의 정이 담긴 교육도, 로씨야인 음악가부부의 동정깊은 인심도, 중국 할빈제1음악학교의 전문수업도 백고산을 세계적인 바이올린연주가로 내세우지는 못하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