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화장품공장 화장품연구소에서 일하는 주영만은 36살의 젊은이이다.
  그가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한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일을 시작한 첫 해에 벌써 조향사로서의 뚜렷한 두각을 나타내였다.
  올해에 공장에서 이룩된 가장 큰 연구성과중의 하나로 꼽는 공기졸향수도 주영만이 개발한것인데 실리적이고 독특하여 대중의 호평을 받고있다.
  그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타고난 조향사라고 말한다.
  그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해 무슨 향수를 치고 어떤 향의 세수비누를 사용하는지도 알아본다고 할 때 아마 그것을 천성이라고밖에 달리 말할수 없을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절로 이루어진 천성이 아니다.
  그가 평양화장품공장에서 일한지는 얼마 안되여도 이 공장에 대한 애착과 정은 이미 철들면서부터 간직되였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것이다.
  사실 평양화장품공장은 그의 아버지의 40여년의 열정이 깃들어있는곳이고 또한 그의 할아버지의 땀과 넋이 스며있는 공장이기때문이다.
  해방전 나라없는 설음안고 멀리 바다건너까지 떠돌며 마음이 깃들곳, 넋이 깃들곳을 찾아 정처없이 헤매이던 그의 할아버지 주승만이 생의 희열이라는것을 알게 된곳이 오늘날 평양화장품공장으로 전변된 바로 이곳이였다.
  평양시 중구역일대의 여기저기에 널려져있던 10여명의 개인상공업자들과 수공업자들이 한데 모여 무었던 자그마한 생산협동조합이 1950년대 말 국가의 방조밑에 여러 생산협동조합과 통합되여 이룩된것이 평양화장품생산협동조합이였다.
  부평초마냥 떠다니던 주승만의 인생도 여기서부터 비로소 참된 삶의 련속으로 이어지게 되였다.
  그때 그의 나이가 58살이였다.
  평양화장품생산협동조합은 그후 인차 평양화장품공장으로 발전하였다.
  평양화장품공장의 첫 조향사 주승만은 이곳에서 71살까지 일하였다.
  그는 공장의 첫 세대답게 나라의 화장품공업발전을 위해 있는 지혜와 열정을 깡그리 다 바치였다.
  수많은 실습생들을 키워냈고 《화장품 제조공》과 같은 책도 집필하여 화장품제조에서 나서는 향료와 관련한 문제들을 체계화하였으며 자신의 피타는 노력으로 터득한 많은 경험과 기술을 후세대에 남기였다.
  사실 그때 당시 향료문제에 대해 관심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당시 향료는 향수제조를 위한 령역으로 제한되여있었고 혹 다른 생활용품들에 향료를 첨가하는 경우에도 원료냄새를 없애기 위한 부차적인 일로 치부되던 때였다. 
  바로 이러한 때에 향료연구의 첫 길을 개척하며 나라의 화장품공업발전사에 뚜렷한 자욱을 새기였다는데 주승만의 몫이 있는것이다.
  현대에 와서 조향사는 향기의 지휘자라고 불리울만큼 그 지위가 높아지고있다.
  화장품의 발전사가 어떤 의미에서는 조향의 발전사라고도 말할수 있다.
  여러가지 악기가 한데 어울려 멋진 화음을 만들어내듯 각이한 향료를 배합하여 새로운 향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조향사인것만큼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그 임무는 더욱 무거워지고있다.
  주승만은 세 아들들중에 그중 오감이 예민한 셋째아들 주리길을 조향사로 키우기 위해 어려서부터 엄격한 요구성을 들이대였다.
  아직은 나라의 화장품공업이 기초단계에 있던 그때에 조향사의 임무와 중요성을 절감하며 그 길에 기어이 아들을 내세운데는 나라의 화장품공업발전을 두고 마음쓰며 아글타글한 주승만의 남다른 애국심이 있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