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직사범대학 최남순
  나는 오늘 30대 초엽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생의 또 하나 소원하고 성취하려던 령마루에 올라서고보니 끓어번지는 기쁨보다도 왜서인지 마음이 축축히 젖어들며 보고싶은 사람들이 많아진다.
  아마도 참으로 기쁜 순간은 저도모르게 마음이 젖어드는 순간인가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기대해주었고 또 얼마나 따뜻한 마음들이 나를 오늘에로 떠밀어주었던가.
  젖어드는 마음은 유년시절과 소녀시절이 흘러간 자그마한 산촌학교, 구리빛 노란 종이 철부지 나의 꿈을 불러주던 그 단층학교 추녀밑에 미소짓고 서계실 교장선생님께로 달려간다.
  교장선생님은 처녀였다.
  그러나 머리에 흰서리가 다문다문 내리고 눈가에 잔주름이 잡히기 시작한 분이였다.
  그런 나이가 되도록 선생님이 혼자 사신다는것이 무척 이상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 자란후에 선생님이 처녀시절에 사랑을 약속했던 애인이 최전연에서 희생되였다는것과 선생님이 바로 그 애인만을 기다리며 한생 교단에서 오로지 우리만을 사랑하며 사신다는것을 알았을 때는 어린 나이에도 선생님앞에만 서면 마음이 이상하게 숭엄해지군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교장선생님을 무척 따랐다.
  소학교 장난꾸러기들이 단추 하나라도 떨구고 학교에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교장선생님의 눈에 걸려들군 하였다.
  교장선생님은 《이게 뭐냐,다 큰애들이…》라고 하며 교장실에 데리고 들어가서는 단추를 꼭꼭 달아서 내보내군 하였다.
  그러면 그런 애들은 마치 그 단추를 훈장이나 단듯이 《교장선생님이 달아주신것이야.》라고 뽐내며 며칠이고 우쭐해서 다니군 하였다.
  단추 하나 떨구지 않고다니는 꼼꼼한 애들이 단추를 떨구고다니는 《더퍼리》들을 오히려 부러워할 정도였다.
  교재림에서 나무를 심거나 물을 줄 때도 아이들은 경쟁적으로 교장선생님곁에서 일하고싶어하였다.
  교장선생님이 우리와 함께 일할 때면 《오, 정말 잘하누나. 다 컸구나…》라는 칭찬을 연방 해주시기때문이였다.
  그 나이에 칭찬을 마다할 아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지금 생각해보면 교장선생님은 꾸지람을 하실 때도 《다 큰 애가…》라고 하셨고 칭찬을 하실 때도 《다 컸구나…》라고 하시였다.
  《다 큰애들!》
  어른들이 콩알만 하다고 하는 소학교학생들이 선생님에게는 정말 《다 큰》애들이였을가?
  아마도 우리가 어서 빨리 자라고 정말 큰 사람들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하도 간절하니 선생님은 우리를 늘 《다 큰애들》이라 하신것은 아닌지.
  정말 이렇게 다 자라 그 마음을 되새겨보니 자꾸만 선생님앞에 나의 존재는 작아지는것만 같다.
  오늘도 나는 교장선생님이 수업참관을 들어오셨던 옛적의 그날을 잊을수 없다.
  나는 어렸을 때 몹시도 새침하고 또 소심한 처녀애였다.
  우리 부모들의 말에 의하면 한번 앵돌아져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옹쳐 물기만 하면 누가 암만 얼려도 잘 돌아서지 않는 맹꽁이였다고 한다.
  학교의 모든 애들이 버릇이 없다고 할 정도로 칭칭 감겨도는 교장선생님 앞에서도 나는 마주치면 갑삭 인사하고는 말이라도 시킬가봐 저어하는듯 머리를 폭 숙이고 인츰 지나가버리는것이 고작이였다.
  사실 약골이였던 나는 나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만족감을 조금도 못 느끼고있었던것 같다.
  오는 감기 가는 감기 다 걸려서 유치원에 못 나가면 공부시간에 인츰 재미도 신심도 잃어버리기가 일쑤였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나는 우리 말도 대강 자체로 익혀버리다나니 글을 읽을 때 토를 뭉청뭉청 빼버리고 읽어서 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되군 하였다.
  그다음부터는 언제 한번 스스로 일어나서 대답하거나 발표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학생이 그리 많지 않은 자그마한 산촌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의 눈길을 끌지 못하는 평범한 소녀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