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1879. 9. 21-1910. 3.26.)은 일제의 조선침략의 원흉 이또 히로부미를 처단한 반일애국렬사이다.
  그는 황해도 해주에서 진사 안태훈의 맏아들로 태여났으며 어릴때 이름은 응칠이였다.
  1894년갑오농민전쟁과 반일의병투쟁을 목격하면서부터 안중근은 일제침략자들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깊이 가지게 되였으며 17살때부터 군사학을 연구하고 자기 집 재산을 팔아서 각종 무기도 구입하였으며 지방소년들로 《향군회》를 조직하고 은밀히 군사훈련도 하였다.
  1907년 8월 이후 안중근은 전국적규모에로 확대발전되여가는 반일의병투쟁에 고무되여 손에 무장을 들고 의병투쟁에 나섰다.
  그는 초기에 동료들과 함께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의병투쟁을 준비하다가 사전에《일진회》도당들의 반역행위로 그 계획이 탄로되자 해외로 망명하였다.
  1907년말에 로씨야의 연해주로 간 그는 동료들을 규합하여 《단지동맹》을 뭇고 그 일대에서 반일의병양성에 힘썼다.
  반일의병대의 참모총장으로 활동한 그는 1909년 6월초에 300여명의 의병대를 이끌고 북부국경일대에 진출하여 함경북도 은덕, 회령 등지에서 일본《수비대》들을 습격함으로써 놈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애국문화운동과 의병투쟁을 통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 안중근은 일제침략자들에 대한 끓어오르는 적개심을 안고 개인테로활동에로 넘어갔다.
  바로 이러한 때인 1909년 가을에 일본추밀원 의장자리에 있던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또 히로부미(이등박문)가 《북만시찰단》의 명목으로 만주에 간다는 정보를 들은 그는 이 기회에 그놈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1909년 10월 19일 울라지보스또크를 출발한 그는 이미 계획한대로 우덕순과 조도선, 류동하를 장춘과 할빈사이의 중간역인 채가구에 보내고 자신은 할빈역을 맡아나섰다.
  10월 26일 아침 9시 특별렬차가 역에 들어서자 이또 히로부미는 렬차에서 내려 짜리로씨야 재무대신 꼬꼬흐체브를 비롯한 각국 외교관들과 인사를 마치고 뒤이어 그곳에 정렬하고있던 로씨야의장병들을 사열하기 시작하였다.
  안중근은 조선인민의 피맺힌 원쑤 이또 히로부미에게 복수의 총탄을 퍼부어 즉사시켰다.
  그는 계속하여 이또 히로부미의 비서관 모리, 할빈주재 일본령사 가와시마, 만선철도리사장 다나까놈을 쏘았다.
  원쑤를 쏴죽인 그는 《조선독립 만세!》를 몇번이나 소리높이 부름으로써 조선인민의 불굴의 애국적기상을 보여주었다.
  안중근에 의한 이또 히로부미의 처단은 조선인민들속에서 뿐아니라 일제를 미워하는 세계의 진보적인 인사들속에서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안중근은 일제교형리들에게 체포된 후에도 자기의 지조를 굽히지 않고 견결히 싸웠다.
  그는 감옥안에서《제일강산》이라는 글을 써붙이고 애국심을 키웠고 《인내》라는 두 글자를 써서 교형리들의 악형을 이겨나갔으며 이또 히로부미의 죄행을 15개 조항으로 묶어 폭로단죄하기도 하였다.
  그 어떤 고문과 회유기만으로써도 안중근의 애국적지조를 꺾을수 없었던 일제는 1910년 3월 26일 그를 야수적으로 사형하였다.
  안중근렬사가 희생된지 110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의 애국정신은 전체 조선민족의 마음속에 살아 숨쉬고있다.(끝)
                                                                                                                                                    박성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