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원 민속학연구소 소장 교수 박사 공명성
  조선인민은 오랜 옛날부터 참매를 길들여 생활에 널리 리용하여오는 과정에 참매와 관련한 독특한 정서를 창조하여 계승발전시켜왔다.
  고대에 조선민족은 이미 참매를 길들여 생활에 리용하였을뿐아니라 참매의 습성을 잘 알고 국가기구의 이름에도 반영하여 응가라는 법기구를 두기도 하였다. 
  또한 고대시기에 조선의 참매는 이미 주변나라들에도 알려져 그 나라들에 참매를 수출하기 시작하였다.
  삼국시기 고구려에서는 참매를 사냥에 널리 리용하여 삼월삼짇날과 같이 국가적으로 중요한 명절놀이가 벌어지고 사냥경기가 널리 조직되는 속에 매를 통한 사냥도 널리 진행하였다. 
  이에 대하여서는 현재 전해져오는 고구려의 무덤벽화를 통하여서도 잘 알수 있다.
  이러한 문화는 발해 및 후기신라시기를 거쳐 고려로 이어져 고려시기에는 매를 전문으로 잡아 생활에 리용하거나 다른 나라들에서 요구하는 사냥매를 수출하는 사업을 전문맡아보는 응방이 설치되기까지 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도 매사냥이 널리 진행되여 매와 관련한 여러 도서들도 많이 출판되기도 하였다.
  매를 통한 사냥놀이를 통하여 우리 인민은 생활을 락천적으로 꾸려나가면서 생활에 필요한 경제적수요를 마련하기도 하였으며 매를 기르는 과정에 매와 관련한 특이한 정서를 배양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말 1930년대초 일본《총독부》가 조선에서의 매사냥과 관련한 자료조사를 진행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당시에도 우리 나라에서 매사냥이 매우 성행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일제는 매들이 한해 잡아들이는 꿩과 토끼의 마리수에 대하여서도 조사하였다.
  당시 매 한마리가 잡아들이는 꿩의 마리수는 보통 20-300마리내외였다.
  비록 일제의 식민지통치시기였지만 조선인민들은 혼례식을 비롯한 크고작은 대사들과 식생활을 전통적인 방법대로 진행하기 위하여 노력하면서 여기에 리용하는 꿩을 보장하기 위하여 매사냥을 진행하였으며 이로 하여 당시에도 총으로 잡아 화약에 끄슬린 《불치》보다 매가 잡는 순순한 《매치》를 더 일러주었다.
  1930년대에 길들인 매 한마리는 쌀 대여섯가마니의 값이 나갔으며 사냥을 잘하는 매는 황소 한마리와도 바꿀 정도였다.
  이러한 조선인민들의 매사냥을 금지시키기 위하여 일제는 여러가지로 책동하였다.
  일제는 조선강점초기부터 조선인민에 대한 사냥의 자유마저 악랄하게 규제한 《수렵단속법》을 강압적으로 실시하였다.
  사냥과 관련한 악법에서 일본인들의 리익을 확보하기 위하여 조선에 기여든 일본인들에게 대대적으로 사냥허가증을 발행하여주어 그들에게 우선권을 부여하였다.
  대표적으로 조선범을 사냥할수 없다고 규제해놓고도 《범구제》라는 미명하에 돈벌이를 목적으로 《정호군》까지 뭇고 조선범을 1910년대 말부터 1920년대 초사이에 대대적인 람획을 진행하여 거의나 멸살시키였다. 
  그러고도 일제는 조선사람들에게 수렵규칙으로 사냥을 할수 없게 여러가지로 규제하였다. 
  《반도인은 일한병합 당시 일체 무기를 몰수당하여 사냥규칙에 의한것 이외에는 렵총의 휴대가 금지되였기때문에 옛날처럼 창이나 화승총으로 사냥을 생업으로 하는 이른바 포수 또는 산포수는 없고 야수를 잡는데는 함정이나 몰이 등을 리용하는것을 북방의 산간에서 그것을 다수 볼수 있다.》〔《조선의 생활과 문화》(일문) 목백서원 1925년 126페지〕
  이러한 사냥규칙은 사실에 있어서 조선사람들의 경제적 및 그밖의 독립적인 요소들을 철저히 막고 조선에 있는 일본인들에게 리권을 주기 위한데 목적이 있었던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