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시 력포구역 주민 리춘선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 감행된 계급적원쑤들의 치떨리는 살륙만행은 나의 고향 성천군 쌍롱면 하리(당시)에서도 있었다.
  1950년 10월 남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고향땅에 나타난 지주아들놈은 일하기 싫어하는자들, 무직건달자들을 긁어모아 면《치안대》라는것을 조직하였다.
  나의 일가친척 23명이 바로 이 《치안대》놈들의 손에 무참히 학살되였다.
  《치안대》놈들은 면당위원장을 하던 아버지의 행처를 따지며 우리 집에도 뛰여들었다.
  그리고는 부락녀맹위원장사업을 하면서 인민군대원호사업에 앞장섰다는 죄로 당장 해산하여야 할 몸이였던 어머니를 강제로 끌고갔다.
  당시 7살이였던 나에게 하루밤 자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어머니는 2살밖에 안된 막내동생 춘화와 함께 놈들에게 끌려 비류강으로 나갔다.
  엄마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음을 떼던 춘화가 무서워 울음을 터치자 《치안대》대장이라는 놈은 소란스럽다며 2살짜리 철부지를 총창으로 꿰여 강변에 내던졌다.
  뜻밖에 광경앞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어머니에게 다가온 그자는 어머니의 배에 구두발을 올려놓고 총창으로 배를 가르고는 태아를 꺼내여 《빨갱이종자》라고 뇌까리며 히히닥거리고나서 그마저 강에 처넣었다.
  그후 나의 일가친척모두가 《치안대》놈들에게 끌려갔다.
  인민군대의 재진격과 함께 《치안대》놈들은 끌고간 사람들을 총살하고는 수직동굴에 처넣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는 총알도 아깝다.》고 하면서 아이들을 어머니들의 품에서 떼내여 산채로 수직동굴에 집어던졌다.
  이에 격분한 사람들의 항거소리는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비명소리로 변하였다.
  얼마후 나는 엄마를 찾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할머니의 등에 업혀있던 5살 난 춘옥이였다.
  동생을 안으려고 내가 두팔을 벌리는 순간 《빨갱이집의 두 딸년이 아직도 살았다.》고 하면서 또다시 총소리가 울렸다.
  언니에게 안기려던 춘옥이는 앞으로 푹 꺼꾸러졌다.
  이날 《치안대》놈들은 이웃마을에서 살던 사람들까지 모두 총살하고 시체들을 수직동굴에 밀어넣고 달아났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았다.
  새벽이 가까와올무렵 의식을 차린 나는 시체를 헤집고 필사의 힘을 다하여 동굴밖으로 나왔다.
  오늘도 계급적원쑤들의 만행의 흔적은 나의 얼굴과 어깨, 손에 력력히 남아있다.
  만행의 후과로 나는 녀성이면 누구나 다 누리게 되는 아이를 낳아키우는 어머니의 권리마저 빼앗겼다.
  70년세월이 지난 오늘 이제는 눈물도 다 말라간다.
  하지만 원쑤에 대한 복수심만은 절대로 변할수 없다.(끝)